[무제] 기록

<span class="sv_member">도해</span>
도해 @OCEAN
2026-07-05 01:40

 “어이, 당신은 어때?”

 “뭐가.”

 “당신 이야기를 좀 해 봐. 당신은 늘 여기서 술만 마시다 가잖아. 단골인 내가 모를 것 같아? 술집에 모였으면 술안주를 대령하는 게 도리지. 거기! 여기로 모여 봐! 이쪽 도련님이 이야기 해 주신단다!”

 “하...”

 

 적당히 시끌벅적한 가게를 찾아서 며칠 다녔을 뿐인데, 벌써 사람이 달라붙다니. 참 재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그 사람이 다른 취객들을 끌어들이는 바람에, 바글바글 많이도 둘러 싸 도망갈 곳조차 마땅치 않았다.

 

 “그렇잖아도 궁금한 참이었어. 어디서 구르다 온 도련님이야? 내가 알기로 이렇게 좋은 재질의 옷을 입는 건 이 근처에선 높은 나리들밖에 없어.”

 “맞아. 그런데 옷은 그렇게 차려입고도 하는 행태나 겉모습이나, 여느 전쟁터에서 몇년은 구르고 온 용병처럼 보이잖아. 형씨, 대체 뭐하다 온 사람이야?”

 “... 당신들은 처음 보는 사람 인생사가 그렇게나 궁금한가?”

 “뭐, 우리가 이상한 게 아니라 당신이 독특한 거겠지? 미안하게 됐어. 우리가 원래 이렇게 막 캐묻고 다니는 사람은 아닌데, 영 궁금해서 말이야. 저쪽 녀석들은 이미 당신이 높은 집 버림받은 자식이라는 데에 돈 걸었더라.”

 “안타깝게 됐어, 우선 그 사람은 돈 떼먹히게 생겼으니.”

 “아싸! 들었냐, 이 자식들아!? 너넨 일단 아니란다!”

 “아, 그거 이번에 받은 보너스 다 건 거였는데! 망할!”

 

 이렇게나 모인 이상 이야기를 내놓지 않고 나갈 도리가 없었다. 며칠 지켜본 결과, 그들은 이 근방의 용병 무리인 모양이었다. 같은 길드 소속에서 용병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매일같이 술을 마시러 오는 자신이 잘못된 것인지, 매일같이 마주치는 그들이 진짜 애주가일지는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악의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일주일 넘게 마주친 탓에 정이라도 든 건지 입은 금방 열렸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 주면 좋겠는데?”

 “오, 진짜 이야기 해 주는 건가? 아직 초저녁이니 처음부터 시작하지.”

 “그래, 처음부터라...”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처음’의 정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됐다. 이곳에 오게 된 계기의 ‘처음’을 이야기할 수도 있었고, 이번 삶의 ‘처음’을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그에게는 다른 삶에서의 ‘처음’도 많았다. 어디가 좋을까. 시간이 많다고 이야기한 건 저쪽이었다. 내뱉은 만큼은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는 술 한 잔을 다 비우고서 입을 뗐다.

 

-

 

 어느 곳에나 있는 이야기다. 인연은 이어져서, 다음 생에도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믿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이 거짓임을 알면서도 당신을 위해 뱉은 말이었다. 당신의 마지막이 덧없지만은 않았기를. 부디 그 삶의 마지막은 희망으로 가득찬 채 끝날 수 있기를... 그렇게 당신을 보내고 우리는 마지막 남은 인류로서 재앙과 마주했다. 그 삶의 마지막은 절망보다는 해방감에 가까웠다. 이제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알리는 죽음. 아, 당신의 마지막은 빛을, 나의 마지막은 어둠을 가득 안은 채 가라앉았으리라.

 

 그렇게 영원할 것만 같았던 잠은 금새 깨어났다. 지능과 이성이 발달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전생의 기억으로 두려움에 가득 차 건드리기만 하면 울음을 터트리고, 한시도 부모님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나는 열 살이 채 되고서야 전생과 현생을 구분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끝났고, 인류는 멸망했으나, 이 세계는 이상할 정도로 평화로웠다. 매일 같이 찾아오던 악몽에서 자유로워질 무렵, 나는 당신을 다시 만났다. 머리색도, 얼굴도, 키도, 목소리도. 성격마저도. 모든 게 달랐고, 오히려 같은 점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어째서 당신이 나의 인연이라는 걸 알 수 있는 걸까. 같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사람을 같은 존재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의미 없는 질문은 채 완성되기 전에 무너져내렸고, 나는 쏟아지는 그리움과 사랑에 굴복했다. 그에게 구애했으며,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는 흔쾌히 나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재앙이 시작되었다.

 평화롭기만 하던 이 세상에 마수라는 존재가 나타났다고, 모두 죽을 거라고 사람들이 떠들었다. 전생의 재앙과는 다른 형태였지만, 모든 것이 멸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점은 다르지 않았다. 무력감은 잠시뿐이었고, 나는 곧바로 검을 들었다. 평화에 찌들어 제대로 싸워본 적조차 없는 이들을 이끌고, 싸우는 법을 가르치고, 격려하며, 그들의 선두에 서 마수와 맞섰다. 오직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서, 당신에게 다른 역사를 안겨주기 위해서.

 그러나 증식이라도 하듯 쏟아져 나오는 적 앞에서, 겨우 제 구실을 하게 된 사람들을 이끌고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우리의 영역은 좁아져만 갔고, 매일 배로 늘어나는 시체를 감당하기 어려워 그저 썩어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게 되었을 때에는. 세상은 이미 절망으로 뒤덮혀 있었다.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불씨는 쉽게만 꺼져 갔고, 바람을 타고 자욱한 안개만이 멀리 퍼졌다. 그렇게 두 번째 삶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우리의 긍지를 위해 서로의 심장에 칼을 박아넣었다.

 

 세 번째 삶의 세계는 그런대로 평형을 이루고 있었다. 갈등과 싸움이 이따금씩 나타났지만, 그것을 조율하는 이가 있었다. 과학 수준은 이전의 삶보다 월등히 발달하여 있었고, 나는 총의 존재를 알고 곧 그것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마법이 허황된 이야기로 알려져 있는 세계였으나, 애초 몸으로 하는 일은 곧잘 하곤 했다. 전투 경험이 남들보다 뛰어났으므로, 그 세계에서는 군인이라고 부르는 직업을 가졌던 것도 같다. 그들은 군사요, 때로는 사병이기도 했고, 용병이 될 수도 있었다. 나는 당신을 다시 만날 것을 예감했고, 그것은 곧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어느 도시의 바텐더로 일하고 있던 당신을 만나 이렇게 매일같이 술을 마셨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쉽사리 당신에게 사랑을 속삭이지 못했다. 이전 삶의 궤적은 끝나지 않은 채 이어지고 있었고, 나는 술에 취해 사랑이 아닌 악몽을 속삭였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나와 함께여서 불행했나요? 애석하게도, 그는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부정의 뜻을 건네었다. 고난이 생기면 함께 손잡고 헤쳐나갈 것이고, 갈등이 생겨도 오랜 시간을 통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무엇도 우리를 떼어놓지 못할 테니, 이제 그만 나의 손을 잡으라고. 아, 그 손을 잡아서는 안 되었는데. 달콤한 꾀임에 넘어가 또다시 당신의 손을 잡은 순간, 세계의 조율자가 사라졌다. 인간은 서로 싸우기 시작해 멈추지 않았고, 다툼을 원치 않았던 이들조차 싸움에 휘말려 스러져갔다. 이윽고 그것이 핵이라는 무기의 사용으로 번졌을 때에는, 나는 그 사람의 아침 식사에 치사량의 독을 탔다. 그 후 죽어가는 별을 지켜보며 고통스럽게 삶을 마감하는 것은, 죄책감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네 번째 삶에서, 나는 오랫동안 생각했다. 전생을 기억하는 것은 어느 세계에서나 이례적인 일인 듯 하니, 이것은 자신에게만 한정되는 이야기였다. 심지어 나의 연인조차도 날 기억하지 못하는 걸 보면, 어떤 저주가 제게 내렸을지도 모른다. 증명이 필요했다. 첫 번째 삶에서의 멸망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그저 나의 죽음만이 재앙의 끝과 함께했을 뿐이다. 그러나 두 번째 삶에서는? 세 번째 삶에선? 나의 그이에게 청혼했던 시기와 세계가 멸망하기 시작한 시점이 묘하게 맞아들어갔다. 이어지는 저주를 풀기 위해서 원인을 확정지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나는 당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당신과 사랑에 빠지고, 또 하나의 세계를 멸망에 빠트렸다. 이 세계에서 인류를 죽게 한 전염병이 처음 발견된 날은, 내가 그에게 영원을 약속한 날이었다.

 

 다섯 번의 탄생을 겪으며, 나는 슬슬 어느 분야에서도 천재라고 불릴 만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망각을 박탈당한 영혼은 아물지 못한 상처에 울부짖었다. 당신과 만나지 않기 위해 집안에 틀어박혔으나, 이번엔 당신은 우체부가 되어 나에게 찾아왔다. 그 후에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 당신을 내치고 몇 차례나 이사를 거듭했지만, 어떤 식으로든 당신과 만났다. 이 또한 저주일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을 만나 사랑하게 된다. 나는 당신과 영원을 약속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당신에 품의 안겨 사랑을 속삭이고, 애정을 갈구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당신을 살리기 위한 나의 선택은 교사(絞死)였다. 그러나 그 다음 날, 나의 시체를 발견한 당신은 어떤 선택을 내렸을까. 답은 영원히 알 수 없다.

 

 여섯 번째 세계는 무척이나 아름다웠고, 인류라고 부를 수 있는 생명체가 거의 없었다. 발전하지 못한 문명에서 나는 많은 것을 만들어내고, 놀라운 속도로 세계가 성장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떤 삶과 비교해 보아도 원시적인 생활이었지만, 그것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적응은 언제나 빨랐다. 걱정되는 것은 언제나 당신과의 만남이었다. 이 세계에서 만난 당신은 깊은 숲속에서 다친 채 생사를 오가고 있었다. 다행히 출혈이 심했으나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아서, 오랜 기간 앓은 끝에 기적적으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나는 세계의 멸망을 예견하면서도 그것이 무척이나 기뻤고, 살아 숨쉬는 당신이 사랑스러웠으나, 곧이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 세계에서 나의 존재는 발명을 이끄는 선구자요, 왕과 같았고, 때로는 신처럼 군림하였다. 희망도, 정의도, 생명도 모두 나를 따랐고, 사람들은 모두 그러한 것들로 나를 불렀다. 이 세계의 나는 칭송받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 세계의 당신은 원인 모를 역병과 죽음을 불러오는 불길한 존재로서 타박받고 있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모든 악재는 당신의 탓이었고, 당신이 불러 일으켰으며, 당신이 존재하기에 일어났다고 여겨졌다. 그리하여 당신은 멸시받는 존재였다. 이 세계에서 우리는 대립되는 존재로서 함께할 수 없었고, 그것이 이전의 삶에도 적용되는 전제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름이란 사소한 것이다. 부모가, 혹은 친인척이 아이의 탄생과 함께 붙여주며, 대부분 길조가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좋은 이름만을 골라 지어주지 않던가. 그리하여 나의 이름은 언제나 탄생과 기적을 뜻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신의 이름에선 늘 그것을 읽어낼 수 없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낯선 단어들을 당신은 이름으로 삼고 있었다. 그것이 온갖 언어로 지어진 죽음과 절망의 애너그램(Anagram)이라는 걸 왜 몰랐을까.

 탄생이 죽음과 사랑에 빠졌으니, 세계가 망하는 것은 곧 순리이리라.

 

-

 

 어느새 모두가 숨죽여 내게 집중하고 있었다. 이야기에 빠져든 것이 분명하다. 잠시 말을 멈추고 주위를 돌아보자, 내가 입을 열지 않을 것을 눈치챈 모양인지 몇몇이 독촉의 말을 뱉었다.

 

“아, 그래서 그 다음이 어떻게 됐는데?”

“닥치고 듣기나 해! 말 끊지 말라고!”

“그 이야기가 당신 삶이랑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뜬금없이 이어진 전생에 얽힌 이야기. 듣고 있던 사람들은 그것이 즉석에서 지어낸 이야기, 혹은 내려져오는 설화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모양새였다. 뒷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얼굴들을 보니 괜히 심술이 피어올랐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이미 술은 다 마시지 않았나? 안주는 더 필요 없을 테니, 내일 다시 만나.”

 “아니, 여기까지 하고 가는 게 어디 있어?!”

 “안 돼, 안 돼!”

 “기왕이다, 술값은 내가 다 낼 테니 마저 이야기해 줘!”

 “이놈들아, 도련님 귀찮게 하지 마라!”

 

 너나없이 달려들어 뒷이야기를 달라고 하는 난리통에, 내게 처음 말을 건넨 이가 다른 이들을 제지시켰다. 아마 그가 이중에서 가장 높은 이이리라. 그의 호통에 다른 이들은 불만스러워 하면서도 길을 비켜주었다. 헤어질 때라는 것을 모두가 알았고, 그도, 나도 알았다. 곤란한 상황에서 빠져나오는 것에 도움을 준 그에게 눈웃음을 지으며, 다음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느릿한 걸음으로 가게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나 우리가 내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걸, 그는 알고서 나를 보내주었을까? 이른 새벽, 동이 트기 전에 나는 마을을 떠날 것이다. 그가 내게 원했고, 그것을 거절하지 못하여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가 말하면 나는 붙잡힐 것이고, 붙잡히면 또다시 사랑하게 될 터이니. 다시 마주치기 전에 떠나는 것이 좋았다.

 나의 사랑스러운 죽음이여, 다음 생에 다시 만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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