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till remember
잃(@isIll0277)님 커미션
“유우카. 고민이라도 있어?”
저를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에 유우카는 정신을 차렸다. 창 밖이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지금 몇 시야?”
“5시.”
깜짝 놀라며 다짜고짜 나온 질문에도 료는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잠깐, 아주 잠깐 생각에 잠겼을 뿐인데 밖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정신을 어디다 빼놓고 다니는건지, 실수가 많은 요즘이었다. 최근 시작한 아르바이트처에서는 포스기 조작법을 헷갈려 엄청나게 긴 대기열을 세웠고, 어제는 빨간불인지도 모르고 길을 걷다가 차에 치일 뻔했다. 심지어 비도 왔었다. 정말 큰일날 뻔했지.
가방을 챙기고 교실을 나서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유우카. 정말로 무슨 일 있어?”
유우카가 울먹이며 말했다.
“요즘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바보같이 실수만 하고….”
료가 유우카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괜찮아, 유우카. 그런 날도 있는거지.”
힘내, 료의 응원에 유우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환한 미소에 먹구름이 잠시나마 가시는 듯 했다.
“다녀왔어~”
료의 귀가에 집에 있던 바쿠라가 현관으로 나왔다.
“그래, 잘도 왔다.”
“말투가 왜 그래? 또 불만이라도 있는거야?”
나란히 현관으로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보고 바쿠라는 소리 쳤다. “너는 또 왜 왔어!”
자연스레 물 흐르듯 집 안으로 들어온 유우카는 바쿠라의 호통에 흠칫했다. 그러나 곧 평정을 되찾았다.
“뭐 어때. 한두번도 아니고.”
한두번도 아닌 건 잘 아네. 바쿠라가 면박을 주자 유우카는 료의 등 뒤로 후다닥 숨었다. 료가 말했다.
“너무 그러지 마. 친구잖아?”
바쿠라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말을 얹지 못했다. 유우카는 뒤를 돌아 바쿠라에게 승리의 브이를 내밀었다. 바쿠라는 한숨을 내쉬고 하던 일을 마저 하기 시작했다.
거실 소파에 늘어져있는 유우카를 하마타면 밟을 뻔한 바쿠라가 짜증을 냈다.
“자꾸 니네 집처럼 있을거냐?”
“네 집이 내 집이고 내 집이 네 집이지 뭐…….”
정작 바쿠라가 유우카의 집에 들어간 적은 없었지만, 유우카의 머릿속에선 수백번은 들락날락 한건지. 서로가 잘 알고 있듯 유우카가 료의 집에 들어와 자기 집처럼 구는 건 한두번이 아니었다. 자기가 뭐라 하려고 해도 집주인인 료가 반대하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왜? 유우카는 친구잖아. 난 좋은데.’
심지어 그것을 반기는 모양이었다. 신세지고 있는 것은 자신이니 이 이상으로 왈가왈부할 수는 없었다. 또, 료는 자기 친구와 관련된 문제로 화나면 종잡을 수 없이 무서워지는 사람이었다. 바쿠라는 신경쓰지 않으려고 애썼다.
한편 유우카는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했다. 바쿠라를 보니 다시 기분이 안 좋아졌다. 바쿠라가 자꾸 시비를 건 것 때문이 아니었다. 유우카는 어젯밤의 악몽을 떠올렸다.
살면서 볼까말까 싶었던 귀한 말을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펄펄 끓는 쇳물에 산 채로 담가졌던 사람들. 어린 유우카도 그 중 한명이었다. 감각은 둔해진지 오래지만 감정만은 가슴 속 깊은 곳에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마저 서서히 둔해지려고 할 때, 갑작스런 악몽이 유우카를 덮쳤다.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꿈 속의 붉은 풍경과 달리 창문으로 보이는 밤은 푸른 색을 띄고 있었다. 급격한 변화에 눈이 아팠다. 급하게 몰아내쉰 호흡은 원령이 되어 유우카 옆을 떠다녔다. 원령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잘못을 저지른 건 유우카가 아니라는 걸 안다. 이제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있다. 그저 원망과 미련만이 남은 반투명한 존재들에게서, 유우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존재 자체가 버거운 이들을 곁에 둘 수밖에 없었다. 다시 살아난 자는 스러져간 자들의 삶의 무게까지 짊어져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유우카는 혼자가 싫었다. 자꾸 료네 집을 제 집마냥 들락날락하는 것도 그래서였다. 삼천년 전 일이 생각나는 건 당연지사였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유우카는 불안할 때면 자주 료 옆에 가있고는 했다. 료도 그걸 알았다. 료는 유우카가 기분이 울적한 이유를 대개 몰랐다. 그래도 유우카를 토닥여주었다. 아는 건 없었지만, 친구가 고생하는 건 싫었다.
유우카가 기분이 안 좋을때는 거실에 나와있지 않았다. 금세 료의 방으로 들어가기 일쑤였다.
바쿠라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정신이 너덜너덜해지기 시작할 때면, 료를 위해 그가 시키는 대로 했던 그때가 떠올랐다. 딱히 무섭지는 않았다. 지금은 되레 우스운 사람인 것같았다. 나한테 별일을 다 시켰던 사람이, 지금은 노란 앞치마나 두르고 주방에서 카레나 끓이고 있다니. 유우카는 이제 두려움보다는 연민을 느꼈다.
일종의 애증이었다. 유우카는 우정이란 부류에 속하는 사랑이더래도 결코 그에게 순수한 애정을 품을수는 없었다. 그때의 일만 생각하면 ‘옥상으로 따라와’같은 대사라도 읊고 싶어졌지만, 또 한편으론 그가 불쌍해 보이기도 했다.
세 명의 바쿠라 료. 그 중 두명은 거의 똑같은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어둠의 바쿠라’나 ‘도적왕 바쿠라’라고 불렸던 사람. 하지만 지금은 명확한 두명이었다. 의심할 필요도 없이, 정신뿐만 아니라 몸이 분리되어 있었다. 지금 이 집에는, 이름과 생김새만은 서로를 쏙 빼닮은 사람 세명이 살고 있었다. 유우카가 좋아하고 있는 상대인, 어릴 적부터 유우카와 친구였던 ‘바쿠라 료’를 제외하면 전부 다 그냥 ‘바쿠라’로 통일되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할 때마다 두명은 서로 개명을 하던가 아무튼 뭔갈 해야겠다면서 짜증을 내기 일쑤였지만…. ‘그럼 뭐해, 반년째 안하고 있는데.’
말만 많고 추진력은 없어요, 유우카는 고개를 저었다. 꼭 닮은 사람들끼리 매일 저렇게 다투는 꼴을 가만히 들여다보자면 퍽 우스웠다.
유우카가 오늘, 금요일에 만난 바쿠라는 삼천년 전 제 친구였다.
“늘 있던 바쿠라는 어디갔어?”
“몰라. 어디 갈 데가 있다는데.”
유우카는 마침 잘 됐다 생각했다. 괜찮아질 때까진 얼굴을 안 보는 게 편했다. 음, 싫어서 피하는 거랑은 엄연히 다르다고. 유우카는 그렇게 생각했다.
“너 어디 아프냐?”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던 유우카에게 바쿠라가 물었다. 그 질문에 유우카는 어이없다는 말투로 응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갑자기. 딱히 아프진 않아.”
“요즘 상태 별로라며. 아니, 솔직히 말해서 안좋아 보인다던데.”
“뭐야, 너 요즘 나랑 만나지도 못했으면서,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스토킹? 그럴리는 없겠지만….
“어제 저녁 먹는데 그녀석이 계속 네 얘기만 했다고. 요즘 상태가 안좋아보인다더니, 뭐라느니…. 귀에 딱지 앉을 뻔했다. 그런 얘기를 들었으면 예의 상 물어보기라도 해줘야지.”
그것과 별개로 걱정도 되고.
그런 말을 내뱉을까 말까 고민하던 바쿠라의 고민은 유우카의 환호성에 의해 금세 깨졌다.
“료가? 저녁식사 내내 내 이야길 했다고?”
이름도 언급하지 않고 단순히 ‘그녀석’이라고만 했지만, 유우카는 알 수 있었다. 바쿠라가 말하는 ‘그녀석’이 누군지!
날 그렇게 걱정해주다니, 귀찮기만 했을텐데…. 역시 료는 천사야! 바쿠라가 이상하게 쳐다보든 말든 유우카는 신경쓰지 않았다.
“야. 넌 걔가 그렇게 좋냐?”
쏘아붙이듯 하는 물음에 유우카는 행복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당연하지. 얘가 뭘 이상한 걸 물어.”
다 알고 있으면서. 유우카 대신 바쿠라의 내면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료를 쳐다보는 유우카의 눈빛. 그를 대할 때 나오는 다정한 목소리. 어리광을 부리는 듯한 행동들.
바쿠라가 바쿠라로서 가질 수 있는 건 삼천년 전의 인연밖에 없었다.
“그래서, 상태는 왜 안 좋은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방방 떠있던 유우카의 얼굴이 금세 굳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말했다.
“별 거 아냐. 악몽을 꿔서 그래. 근데 잘 잊혀지지가 않아. 별것도 아닌데.”
별 거 아냐, 별 것도 아닌데….
생각의 끝이 흐려졌다. 유우카에게 쿨에르나가 별것도 아닌 적은 한번도 없었다.
바쿠라가 그 큰 손으로 유우카의 머리를 짚었다.
“거짓말하지 마.”
자그마치 삼천년 전부터 보고 있던 상대다. 모를 리가 없지. 어쩜 이렇게 하나도 안 바뀌었을까. 바쿠라는 마음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쿨 에르나.”
어떻게 말해야할지 단어만 뱉어냈다. 하지만 의미를 전달하기엔 충분했다. 바쿠라의 몸에도 똑똑히 새겨진 그날의 기억이 스멀스멀 살아나기 시작했다.
바쿠라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었지만 위로하기 힘든 주제가 바로 쿨에르나였다.
“넌 아무 잘못 없잖아.”
그 한마디가 다였다. 고작, 너는 잘못한 게 없다는 의미없는 한마디다. 유우카도 떨리는 목소리로 위로를 주고받았다.
“너한테도 아무 잘못 없어.”
바쿠라는 가만히 생각했다. 그러고는 조용히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다른 건 다 제쳐두더라도, 세계를 멸망시킬 뻔했다. 무고한 사람들을 끌어들일 뻔했다. 마치 삼천년 전의 자신들처럼. 일이 일어난 순서는 아무래도 관계없었다. 바쿠라는 이제서야 그게 얼마나 큰 잘못인지 깨달았다.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왔다고 하지만 바쿠라의 마음 속엔 어딘가 평생 그일이 남아있을 것이다.
우울해하니까, 단거라도 먹여서 한숨 재워야지. 그런 처방을 막 내렸을 때 유우카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그때의 너는 죽었어.”
죽었단말야. 유우카는 울며 악을 썼다. 그건 삼천년전부터 옆에 있었던 제 친구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렇게 되뇌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같았다.
동료 하나없이 원령들 사이를 헤메며 복수의 날을 갈던 사람. 비극적인 쿨에르나 마을의 생존자. 옷을 피로 적시고 다니는, 잔악무도한 살인자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전까지 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러나 다 끝난 일이다. 이제 다 끝난 일이었다. 유우카는 아직까지도 그 틀에 자신을 가두는 제 친구를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가 왜? 먼저 잘못한 건 그 사람들이잖아.
멀쩡히 살고 있는 우리를 펄펄 끓는 쇳물에 집어넣은 건 그 사람들이잖아. 너는 아직도 못 잊고 있잖아.
유우카는 친구의 옷자락을 붙잡고 펑펑 울었다.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비처럼 쏟아내리는 눈물에 옷이 진하게 물들어갔다.
억지인 걸 알았다. 저쪽이 먼저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이쪽에서 저지른 일이 정당성을 부여받는 것은 아니었다. 유우카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제멋대로였다. 나쁜 사람이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지만 착한 사람이라고 불리기에도 부적합했다. 유우카와 바쿠라는 둘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꾸 바쿠라에게 억지를 부렸다. 제 친구가 편해졌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나라도 아득바득 그곳을 빠져나와 네 곁에 있어줬어야 했는데. 후회가 심장을 짓눌렀다. 다 지난 일인데도, 다 지난 일인데도. 머리로는 알지만 심장이 납득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
바쿠라는 그저 옆에서 가만히 어깨를 토닥여줬다. 어줍잖은 위로만큼 상처주는게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안도했다. 료는 모르는 일, 자신하고 밖에 위로를 주고받을 수 없는 일. 바쿠라는 애써 마음을 짓누르며 따뜻한 핫초코를 건넸다. 너무 많이 울어서 숨이 가쁜 유우카가 보였다.
피어나는 감정은 억지로 접을 수 없다. 계절이 지나도 지지 않는 것은 수두룩했다. 눈처럼 내리는 낙화가 발밑에 수두룩하게 쌓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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