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레슈벨님
엘렌의 일기를 기반으로 커미션 넣은 글입니다.
너무나도 좋은 .. 글을 받았기 때문에 다들 읽어주셨으면 좋겠다...
(+ 대충 잔느가 글을 읽는다는 설정 )
잔 다르크는 조용히 잠든 소녀를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소녀는 숨소리 하나 없이 잠들어 있었다.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던 잔 다르크는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치 잠든 아이를 쓰다듬는 어머니처럼 조심스러운 손길은 소녀 위에 살포시 덮여 있는 성해포로 향했다. 성해포가 단단히 덮여 있는 것을 확인한 잔 다르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몸을 일으켰다.
소녀, 잔 다르크의 마스터인 엘렌은 평안한 밤을 보내고 있었다. 그 사실이 무엇보다 다행스러웠다. 며칠 전 있었던 발작 사건이 꼭 없었던 일인 마냥 고요히 잠들어 있는 모습이 잔 다르크의 마음을 묘하게 찔렀다. 마스터는 아주 여린 사람이었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눈치 챈 이는 몇 없는 듯 했지만 잔 다르크는 첫 눈에 알 수 있었다. 엘렌이라는 소녀는 구국의 성녀라 불리는, 그러나 잔혹한 불꽃 속에서 스러졌던 한 소녀와 무척 닮아있다는 사실을.
방 안에 걸린 시계를 힐끗 바라보자 굵은 시침이 막 한 시를 가리켰다. 모두가 잠든 고요한 밤이었다. 후우, 자그마한 숨을 내쉰 잔 다르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번트는 수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지만 칼데아와 계약 되어있는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이제야 막 두 번째 특이점을 해결한 칼데아는 여전히 수복해야 할 시스템이 많았다. 따라서 서번트에게 공급해야 할 마력의 생성도 그리 원활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밤에는 영체화 혹은 수면으로 전력 소모를 줄일 것이 권장되고 있다. 잔 다르크는 마스터를 지켜봐야하는 입장이기에 깊은 수면에 들 수는 없었지만 짧은 선잠 정도라면 취할 수 있었다. 영체화 하는 쪽이 마력 온존에는 더 도움이 되겠지만, 혹여나 잠에서 깨어난 엘렌이 저의 부재에 당황해선 안 되었기에 실체화를 유지하는 편이 나았다.
잔 다르크는 사뿐사뿐 방을 거닐며 작은 밤 산책을 즐겼다. 몇 걸음 더 걷고 나면 가볍게 잠을 취할 생각이었다. 그 때 마스터의 책상 위 놓인 작은 수첩이 시선을 끈 것은 분명한 우연이었다. 훔쳐 볼 생각은 없었다. 부주의하게 펼쳐져 있는 수첩을 닫아 책장에 정리할 생각 뿐. 다만 흰 수첩 위에 휘갈겨진 단어가 잔 다르크의 눈에 들어온 것은 어쩌면 필연일지도 몰랐다.
“이건...”
분명한 고통의 흔적이었다. 저도 모르게 수첩에 손을 뻗은 잔 다르크는 조심스레 수첩을 쥐었다. 얇지 않은 수첩에는 일기 비슷한 것이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하지만 평범한 일기는 아니었다. 펜이 눌린 매 자국마다 끈적한 절망이 묻어 나오고, 죽죽 그어진 선에선 고통이 스며 나왔다. 터져 나오려는 숨을 억지로 눌러 참은 잔 다르크는 고개를 천천히 돌려 잠들어 있는 제 마스터를 바라보았다.
“마스터... 이런 건, 대체 언제...?”
수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잔 다르크는 차갑게 식은 손끝으로 조심스레 수첩을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혹 다음 페이지엔 다른 말이 쓰여 있지 않을까, 이 가녀린 소녀에게 삶을 긍정하게 할 동아줄이 정말 하나도 없었을까. 페이지를 넘기는 사락사락 작은 소리가 잔 다르크의 거친 심장 소리와 겹쳐 크게 울렸다. 큰 죄라도 짓고 있는 것 마냥 잔 다르크는 연신 마스터를 힐끔대며 조심스레 수첩을 훑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없었다. 엘렌의 수첩에는 오로지 부정뿐이었다. 그나마 제 이름이 적힌 부분에서는 엷은 즐거움이나마 보였으나 그마저도 얼마 되지 않았다. 평범한 날의 일상을 기록한 페이지에서도 잔 다르크는 고통을 읽어낼 수 있었다. 몸과 정신을 갉아먹는 저주는 결국 엘렌 본인을 스스로 저주하는 고통에까지 다다라...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읽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잔 다르크는 수첩을 읽는 것이 제 사명이기라도 한 듯 아주 느리게, 그러나 꼼꼼히 일기를 읽어 나갔다.
몸을 산 채로 찢기는 고통, 심장이 타오르는 고통, 머리를 끓는 모래에 집어넣는 고통, 벌레들이 살갗을 깨물며 파고드는 고통, 저주, 악, 온갖 부정들. 엘렌의 필체로 또박또박 적혀 있는 저주들은 잔 다르크 또한 무척이나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업화 속에서 불타오른 소녀는 저주에 묻혀 녹아내리는 소녀를 보았다. 실은,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소녀가 짊어진 고통은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고. 그럼에도 잔 다르크는 알 수 없었다. 저의 마스터는 언제나 밝게 웃고 있었으니까.
“이것 또한... 알려고 하지 않은 저의 죄일까요.”
조심스러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소리 나지 않게 수첩을 내려놓은 잔 다르크는 다시 엘렌의 곁에 다가가 앉았다. 색색 작은 숨소리 내며 잠들어 있는 엘렌은 지금 한 순간 만큼은 무척이나 평온해 보였다. 잔 다르크는 고르게 오르내리는 가슴팍에 손을 얹고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저를 삼켰던 불꽃이 그를 삼키지 않게 해주소서. 소녀가 가시밭길을 걸어가야 할 운명이라면 최소한 저를 방패삼아 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게 해주소서. 주여, 부디...
잔 다르크는 눈을 떴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몰래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나아가는 소녀를 붙잡을 수도, 도망치게 만들어 줄 수도 없었다. 마스터는, 엘렌은 물러서려 하지 않을 테니까. 속이 괴로움에 문드러지고 썩어 떨어져 나가더라도 그의 마스터는 앞을 향해 고개를 빳빳이 드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방패가 되리라. 부서지는 몸을 이끌고 나아가는 소녀의 앞에서 저 또한 고개를 쳐들고 서있겠노라고, 잔 다르크는 굳게 다짐했다.
달은 기울고 별은 떨어졌다. 엘렌의 곁에 앉은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잔 다르크는 시침이 7시를 가리킨 것을 확인하고 엘렌의 몸을 살포시 흔들었다.
“마스터, 마스터. 좋은 아침이에요. 일어날 시간입니다.”
“으으응... 엄마... 10분만...”
“엄마가 아니라 잔 다르크입니다. 아침이에요. 빨리 일어나지 않으면 아침 식사를 못 먹게 될 거예요, 마스터. 어서 일어나야죠!”
우으으응...... 끙끙대며 이불을 뒤집어 쓴 채 굴러다니던 엘렌은 겨우 눈을 떴다. 부스스한 붉은 머리 사이로 보랏빛 눈을 마주한 잔 다르크는 푸른빛 눈을 예쁘게 휘어 웃으며 말했다.
“좋은 꿈 꿨나요?”
“응, 덕분에... 좋은 아침, 잔느.”
엘렌의 눈에는 여전히 아침잠이 씌어있었다. 잔 다르크는 쿡쿡 웃으며 엘렌의 손을 쥐고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었다.
잔 다르크는 느릿느릿하게 나갈 채비를 하는 엘렌의 뒷모습을 한 걸음 뒤에서 지켜보았다. 엘렌이 좋은 꿈을 꿀 수 없다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잔 다르크는 매일 밤과 아침 인사로 그에게 좋은 꿈을, 편안한 수면을 기원했다. 혹 제 기도가 닿아 소녀에게도 좋은 꿈이 찾아오는 날이 오면 좋겠다고 작은 소망을 빌며.
“그럼 갈까, 잔느.”
“네. 마스터.”
잔 다르크는 언제나 그랬듯 마스터의 곁에 섰다. 다가온 잔 다르크에게 웃어 보인 엘렌은 명랑하게 조잘거렸다. 오늘 아침은 프랑스식 샌드위치래. 잠봉뵈르도 있을까? 잔 다르크는 마주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네. 있을 거예요. 잔뜩 먹고 기운내서 오늘 하루도 힘내 봐요,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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