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오브] 과거의 편린
글 ⓒ곤약정신님
그림 ⓒ후식님
글 커미션과 그에 어울리는 그림 커미션을 부탁드렸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내용.. 아름다운 그림... 감사합니다.
커다란 굉음이 검은장막 숲을 울렸다. 지레 놀란 새 따위의 동물들이 하늘로 도망치듯 날아오르고, 무엇인지 모를 악취가 코를 찔렀다. 에이리크는 눈앞의 상황에 집중할 수 있도록 창의 손잡이를 쥔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시야 앞을 가득 채운 건 평균적인 개체의 사이즈를 살짝 웃도는 크기의 거미전갈. 뾰족한 꼬리 끝이 금방이라도 사람을 뚫어 갈기갈기 찢을 것처럼 위협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다만 에이리크는 의연했다. 아, 스타티스. 어제도 새벽까지 마물 토벌을 했으면서 또 의뢰받겠다고? 라며 그의 —목소리로는 누군지 전혀 분간이 가지 않는— 동료가 걱정을 표했을 때도, 의뢰를 전한 불멸대 이병이 혼자 처리하기엔 버거울 수 있다고 전했을 때도 그랬듯이. 괜찮아요. 제 실력 아시잖아요. 그려내듯이 미소를 짓고 가볍게 흘려낸 대답은 믿음을 주기 위한 행동이라기보단 그의 삶을 구성하는 관성의 짧은 재연이었다.
반격하기 위해 날카로운 창이 깨끗한 궤적을 그렸다. 은빛 날에 저녁노을이 반사되어 신기루 같은 잔상이 눈꺼풀에 남았다. 불분명한 풍경 속, 눈을 깜빡였다. 그와 동시에 두꺼운 거미전갈의 가죽이 열리는 감각이 손끝에서 진동했다. 헛손질할 리 없지. 살을 가르는 고통에 거미전갈이 비명을 지르듯이 끽끽 댔다. 분노에 눈이 먼 것인지, 상대는 곧바로 앞발을 크게 휘둘러왔다. 그 무게를 자신이 이겨낼 리 없었다. 짧은 시간에 계산을 끝마친 에이리크는 빠르게 뒤로 몸을 물렸다.
결과적으로는 좋은 판단이었다. 그 직후에 주위를 크게 돌며 꼬리를 휘두르는 몬스터를 지켜보며 에이리크는 잠시 숨을 골랐다.
거미전갈은 급소부터 노리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공격이 가능한 부위가 두 개나 되기 때문이지요. …… 에이리크는 이 목소리의 주인을 알았다. 의심할 구석 없이 합리적인 조언을 일러주는 다정한 목소리는 잊을 수 없다. 그러나 6 년이 다 되어가는 공백은 스승의 지식에 자신의 경험을 더할 세월이었다. 에이리크는 지금껏 길게 휘둘렀던 창을 좀 더 짧게 잡았다.
쿵!
에이리크는 왼발 바로 옆에 박힌 앞발과 휘청이는 커다란 몸통을 확인한다. 목숨을 사수하려는 듯 꿈틀거리는 꼬리가 어디를 향할지는 자명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땅을 박차고 가볍게 뛰어오르고,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몇 초 내로 자세를 견고히 했다. 그렇게 창과 땅이 비스듬한 각도를 이룰 때. 이를 악물고 창을 아래로 내리박았다. 거죽만 벗겨내듯 스쳤던 전과 달리, 긴 촉이 육중한 살점 안으로 깊숙이 파고듦을 느꼈다. 피어오르는 열감처럼 더없이 진부한 고통이 느껴진 것도 바로 그 시점이었을까.
창을 갈무리하고 거미전갈의 꼬리를 챙긴 후에야 에이리크는 어깨에 길게 난 상처를 확인했다. 거미전갈의 꼬리에는 독성이 없다. 그렇기에 어깨를 내준 것이었으므로 예상한 범위 내의 일이었다.
그리고 이번엔 위치도 운이 좋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아주 오래전에 얻은 상처는 세월이 가도 지워지질 않으니, 다른 것으로 가릴 수밖에. 다정하고 겁 많은 그 사람이 이를 본다면 더 이상 에이리크를 미숙한 수호자 나부랭이로 볼 수는 없을 터다. 애초에 붕대조차 챙겨올 성의를 보이지 않았으므로 상처의 위중함을 확인하는 것 이상의 조처를 하는 대신 에이리크는 저만치 먼 수평선으로 시선을 돌렸다. 빠르게 어두워진다 싶었던 하늘은 어느새 까맣게 물들어 있었고, 듬성듬성 별이 박혀있었다.
그리다니아로 돌아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밤의 숲은 움직이는 것보다 한 자리에서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은 모험가들 사이에서 상식이었다.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가볍게 관찰하고자 주변을 둘러보자, 가까이에 높은 바위 지대가 있음을 발견한다. 저 중에 몸을 기댈만한 곳은 있겠지. 그 생각대로였다.
가장 높은 곳, 영롱하게 빛나는 보름달이 머리맡의 등불이 되어주고 있었다. 잠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만 은은하게. 그 아래에 있는 지상의 존재들을 어딘가로 이끌듯. 그 때문일까, 에이리크는 답지 않게 향수에 젖어 들고 말았다. 도저히 목적도, 당위도 찾아볼 수 없게 된 불분명한 모험 속에서 그가 기억하는 유일한 이정표를.
오브를 사랑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신에 대한 불신을 야기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스승은 늘 주었던 답 대신 질문으로 채워나갈 간극만을 남겼다. 더 이상 답을 대신 찾아주지 않겠노라 통보하듯이. 실망이었나, 두려움이었나, 그것도 아니라면 싫증 난 것뿐이었나. 에이리크가 부드러이 깍지 껴 맞잡은 손에 사심 하나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눈치 없는 사람이 무언갈 알아채기라도 한 걸까.
어느 날은 그를 정열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고, 또 다음 날이 되면 그가 원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떨 때는 왜 나를 버렸냐고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 들기도 했다. 하루하루가 스승의 존재 위로 천처럼 덥혔다. 며칠이고 몇 달이고 감정을 쏟아내고 나면 오브를 다시 돌아보고자 할 때 정리되지 않은 감정의 편린만을 마주하게 되었다. 걷어내면 그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긴 할까? 마치 에이리크 그 자신의 유독한 사랑에서 오브를 지켜내려고 한, 무의식적으로 쌓아 올린 방어기제가 자신을 막아서고 있는 것 같았다. 수 겹의 천 조각에 뒤엎힌 오브를 사랑하는 것은 진실로 오브를 사랑한다는 의미일까? 보편적인 사랑에서 멀어지더라도 여전히 사랑일까. 다만 그의 애달픈 마음이 본능적으로 토해내는 답은 ‘그렇다’였다. 그 질문만큼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고,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보면 에이리크는 늘 그랬다. 어쩌면 냉정하고 또 가식으로 점철된 사람이었지만 오브에 한해서는 아낌없이 내주려고 안달이 나 있었지. 또 보라. 6 년 전부터 지금까지 남아있었던 상처와 스타티스라는 이름은 자신으로 하여금 오브를 잊지 못하게 하였다. 그렇다면 자신은? 오브가 자신을 잊지 못하도록 무언가를 남기기라도 했던가? 남길 수 있도록 오브가 허락이라도 해준 적 있었던가. 그의 집을 빛의 꽃으로 잔뜩 채워 넣었다면 그 집을 떠났을 것이고, 몸에서 떼어놓지 말아달라 어린아이처럼 조르면서까지 준 선물은 아주 쉬이 버려졌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만 자신의 스승을 온전히 소유할 수 있단 말인가?
애당초 그를 눈앞에 둘 수 없다면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오브의 소식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잠시 이슈가르드에 머물렀던 시점에 여관의 주인은 몇 달 이내로 흔치 않은 비에라족 남성을 본 게 신기하다며 말을 걸어왔었다. 실상 익숙한 반응이었지만, 입 가벼운 여관주인이 줄줄이 내뱉은 말에 에이리크는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짙은 피부에 조곤조곤한 말씨의 비에라 남성이라면 제 스승을 의심해볼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한 인상착의였으므로. 그러나 그 비에라족이 어디에서 지내는지 아냐는 질문에 빌어먹을 여관 주인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오히려 의심을 표하듯 가늘게 눈을 뜨며 에이리크를 훑어보기나 했지. 그가 제 발로 자신에게 오길 바라는 건 여전했다. 적어도 그의 소재지를 알아둔다면 이렇게까지 불안하지 않을 것 같았을 뿐이었는데.
몇 년 치의 모험의 그 어떤 요소도 에이리크가 바라는 종류의 깨달음을 주지 않았다. 하여 에이리크는 눈앞의 환한 보름달이 제게 그 어떤 답도 하사해 주지 않을 것을 알았다. 지혈조차 하지 않은 탓에 어깨는 저렸고, 오늘 하루 쉼 없이 움직인 탓에 몸 곳곳이 뻐근했다.
에이리크는 눈을 감고 스승과 저 사이의 거리를 조용히 가늠해 보았다. 몸과 몸 사이. 마음과 마음 사이. 그 어느 부근. 여관 주인을 만난 이후로는 이슈가르드를 중심으로 크게 주위를 맴돌면서 너무 멀리 떠나지는 않으려고 노력했다. 다분히 개인적인 이유로 인한 선택이었으므로 그가 몸담은 모험가 파티에는 제대로 된 설명을 주지 못했다. 지금이야 에이리크를 믿고 따라주겠지만 곧 있으면 궁금증이 생길지도 모르지. 하나같이 바보 같은 얼굴들이 끝없이 왜냐고 물어보는 것이 얼마나 성가실지 떠올리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역시 아직은 오브를 붙잡아둘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가 원망하건 말건 팔다리를 묶어두고 싶었고, 늘 저만 떠올릴 수 있도록 그의 생각마저 제한하고 싶었다. 여전히 그저 욕망을 늘어놓는 것 뿐에 가까운, 수 겹의 천을 파헤치기 위한 지난한 행위. 그건 사랑이었다. 혹은 증오였다. 그래. 오브. 나의 스승님.
“스승님은 제게 돌아오는 길을 알아요, 그렇죠?”
목소리는 한 번 울렸다가 아래로 흩어졌다. 숨은 밤과 함께 천천히 몰려들었다가 꺼졌다.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 다음글[하야세이] 어느 발렌타인 26.02.1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