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야세이]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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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해 @OCEAN
2026-02-11 09:37

ⓒ련사님


여느 날처럼 과로 후 쓰러진 하야토. 이런 일이 반복되자 보다 못한 세이조는 휴식이라는 이름 하에 바다에 가자고 한다.

하야토는 못 받아주겠다 싶으면서도, 짜증날 정도로 얼짱대는게 더 신경쓰여서 결국 바다로 가게 되는데...


파랑의 소리는 소음 같았으나 동시에 고요했다. 화이트 노이즈라는 게 괜히 있는 건 아닌가 보지. 하야토는 샌들 사이로 들어와 발을 간지럽히는 모래를 차내며 파도를 주시했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나쁘진 않았다. 딱 그 정도의 감상이었다.
그러나 그의 동행자는 뭐가 좋다고 저렇게 움직이는지, 바지런한 움직임을 따라 희뿌연 사세에 자국이 남았다. 처음이라고 해도 너무 호들갑 아닌가?
옆의 불만스러운 기색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 건지, 세이조는 신날 발걸음으로 파도를 맞이하고 또 젖은 발자국을 모래 위에 남기기를 반복했다. 바닷바람은 생각보다는 차가웠고, 모래사장으로 찾아오는 파도는 또 기대보다 따뜻하다. 처음 맞이하는 바다는 모든 것이 기대 이상이었고, 또 색다르다. 바닷바람에 섞인 미미한 향이 그의 마음을 계속 들뜨게 했다.

 
“이제야 좀 마음에 드나?”
하야토의 빈정거림에도 세이조의 기분은 가라앉긴커녕 여전히 공중을 맴돌았다. 늘 짓던 천진한 표정이 본연의 마음과 맞물려 평상시보다 더욱 밝아 보였다.
“그래, 맨날 돌아오기만 하면 쓰러져서 빌빌 죽어가던 인간도 좀 살 것 같아 보이니 마음에 드네. 그렇게 말하면 짜증 낼 줄 알았냐?”
어련하시겠어. 그를 이겼다는 듯 상쾌한 얼굴로 웃는 세이조를 보며 하야토는 다시 빈정거렸다. 비린내 섞인 바람이 뭐가 좋다고 저렇게 정면으로 맞으면서 돌아다니는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으나 딱히 제지하거나 막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살 것 같다고? 하야토는 딱히 스스로가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 것을 두고 죽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다.
몰아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적당히 체력을 주고 다른 것을 취했을 뿐이다. 그 모습이 퍽이나 신경 쓰이는 모양이지. 이곳에 와서 제게는 단 한 번의 시선만 주었을 뿐, 파랑 사이를 거스르며 바닷가를 즐기는 그가 괘씸했으나 저것도 ‘스스로가 준 기회’다. 결국 그의 일거수일투족, 지금 기뻐하는 것까지도 스스로가 제공한 기쁨이다. 그 사실 하나는 만족스럽다.
저 정도의 괘씸함은 넘어가 줄까. 하야토는 느긋한 걸음걸이와 함께 모래사장에 놓인 선베드로 향했다.

 
지치지도 않는지, 세이조의 바다 맞이는 정면으로 쬐는 햇볕에도 끝나지 않았다. 보다 못한 하야토가 파도와 모래의 경계면까지 찾아가 데려와서야 환영이 끝났다. 닿기도 싫으면서 왜 굳이 잘 놀고 있는 사람을 데려가려고 하는 거야? 세이조의 투덜거림 은 선베드에 도달할 때까지 이어졌으나 늘 그렇듯, 그의 투덜거림은 하야토에게 닿지 않았다.
선베드의 그늘막 사이로 고개를 숨긴 세이조는 파도를 대신해 모래에 집중했다. 쪼그려 앉아 모래놀이하는 게 뭐가 재미있다는 건지……. 기어코 그를 데리고 와선 방치한 하야토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것에 의의를 둔 것인지, 그 행동까지는 막지 않았다.

 
“바다에 오니 어린애가 되는 취미라도 생겼나?”
“뭐라는 거야, 누구나 하는 거거든?”
언제나 그렇듯 하야토는 세이조에게 어울려주지 않는다. 그래도 빈정거림이 한 번이면 덜한 편이다. (투덜거리긴 했어도) 순순히 끌려와 준 것이 어지간히 괜찮았나 보지? 선베드에 앉아 행동을 지켜보는 하야토를 흘겨본 세이조는 모래 동산을 쌓으며 입을 열었다.

 
“어릴 적엔 누구나 이런 취미가 있는 법이라고. 동심 몰라?”

“좋은 기억이 뭐가 있다고 잘도 동심 이야기를 꺼내는군.”

“네가 할 말이야?”
어처구니없다는 듯 선베드로 시선을 올린 세이조가 인상을 찌푸렸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됐다, 내가 말을 말지. 다시 모래밭에 시선을 돌린 세이조는 저 동행인의 숱한 빈정거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들뜬 마음이었다. 햇볕이 닿은 모래는 따뜻했고, 바람은 적당히 부드럽다. 손에 닿은 감각은 세피아 빛으로 돌아와 그에게서 몇 없는 추억을 상기시켰다.
“네 말대로 좋은 기억이 많이 없긴 하지만, 없는 건 아니거든?”
퇴색된 빛과 모래색이 겹쳐 따뜻한 순간을 만들었다. 바람에 흩날려 사라지지 않는 상은 머릿속 한 곳에 박혀있다. 빛이 바랬을지언정 순간의 풍경은 여태 상세했다. 미화된 기억은 그러했다.

 
“어렸을 적엔 다른 애들처럼 별거 없었어. 좀 가난해도 그 시절엔 몰랐으니까, 그냥 놀 수 있으면 나가서 놀이터에 가서 놀았지.” 

그 시절 아이들에게서 돈은 계급을 나누는 요소가 아니었다.
뭘 몰라서 가능한 일이었지만 적어도 그때는 그러했다. 마냥 즐거웠다고 말할 순 없지만 숱한 앞날보다는 그래도 행복했던 순간, 긍정적으로 포장하고 남길 수 있는 기억. 하야토가 조사한 세이조의 내력에서 한 줄의 줄글로도 남지 않았을 이야기는 바닷바람에 밀려 그 상이 맺혔다.
“그때 나랑 자주 놀던 애가 있었거든? 몸이 엄청 약해서 놀이터에서 으스대던 애들한테 맨날 치여서 저 구석에서 혼자 놀던 애였어.”
애들의 괴롭힘이 오죽했겠냐면서도, 아이들에게는 아이들만의 사회가 있는 법이다. 놀이터를 장악하고 주도하는 무리에게 밉보이는 순간 홀로 동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 아이는 그렇게 고립되었고, 어린 세이조는 그 시절의 아이를 외면하지 못했다. 한 번이 두 번, 그리고 두 번이 세 번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어울린 아이는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함께 놀게 되었다.
미끄럼틀이 세 개, 시소가 두 개, 그네가 세 개. 정글짐과 철봉도 있는 그 큰 놀이터에서 그들이 자주 하던 모래놀이는 세피아 빛과 모래 빛이 섞여 은은한 온기를 띠었다. 놀이터의 전경을 읊으며 옅게 흥얼대던 목소리가 모래바람에 흩날린다. 하야토는 그 소리를 들었다.
세이조의 손에 모래 속 온기가 쥐어졌다. 팍팍한 삶, 그리고 웬 이상한 놈까지 만나 얽히고설켜 엉망이 된 그 삶 속에서 온전히 풀어진 몇 없는 것. 여전히 밉고 죽일 만큼 싫더라도 외면할 수 없는 이에게 한 번쯤은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

 
웬일로 장단을 맞춰서 그냥 들어주고 있대? 세이조는 흘끗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야토는 달리 빈정거리거나, 외면하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모래놀이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그 모습은 평상시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저놈이 그러면 그렇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은 친숙하다 못해 질색하게 된다. 내가 너 같은 놈한테 말해준 게 괜한 일이지. 세이조는 입안의 아린 맛을 다시며 다시 모래놀이에 집중했다. 같이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여전히 모래는 따뜻했다.

 
“…….”
하야토는 분명히 기억했다.
놀이터에서 대장 행세를 하던 그 무리가 귀찮아서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었지만 그때 당시 연약한 몸은 그들을 견딜 수 없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혼자가 되고 어울리는 이 없이 고립되었으나 그런 상황에서도 제게 다가와 기어코 같이 놀던 아이의 머리카락은 검은 밤하늘이었다.
그래, 마치 지금 모래바람에 휘날려 흔들리는 저 색과도 같은…….
그러나 하야토는 이미 자신을 죽였다. 그 시절의 자신을 포기하고 과거를 놓았으며 지금도 놓아 제게서 멀리 떨어트렸다. 그 시절은 너무나 멀었고, 더 이상 닿을 길이 없다. 그는 늘 그랬듯이 이를 버렸다.
오즈미 세이조, 우리에겐 더 이상 그런 순간이 없어. 적어도 내게는…….

 
미끄럼틀이 세 개, 시소가 두 개, 그네가 세 개. 정글짐과 철봉이 있는 놀이터는 세이조의 것이었으나 하야토의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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